자기가 자기를 안다고 여길 뿐이지. 자기가 자기를 볼 때 어떻게 보는지 아세요? 내가 나를 볼 때 왜곡된 필터를 가지고 자기를 본다니까요. 그러니까 가짜 나만 만나요. 죽을 때까지 진짜 나를 못 만나요. 제 분별의 필터를 가지고 나를 해석해서 나를 만나요.
그 해석된 덧칠이 없으면 생각의 덧칠이 없으면 분별망상으로 왜곡하는 색안경이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곧장 보게 돼요. 왜곡해서 보는 게 아니라 곧장 바라보게 돼요. 막힘없이 바라보게 돼요. 자제하게 보게 돼요. 그게 관자제예요.
자기를 이해하고 분별 하는 법
관자제 자제하게 관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관을 설명할 때 항상 지관이 따라붙어요. 지관 지관이 관자제와 같은 거예요. 자제하게 본다라는 것이 분별로 보지 않고 막힘없이 자제하게 본다는 거거든요. 지관이 분별을 멈추고 멈출 지자 분별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거예요.
이게 불교의 되게 중요한. 핵심이에요,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 이게 바람 일다 거든요. 불교 수행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 지관 정해라고 말하거든요. 그러니 첫마디, 첫 등장인물의 본명에서부터 이름에서부터 관자제. 취하거나 버리려는 취사 간택심을 일으킨단 말이죠.
그냥 볼 때 보기만 한다면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죠?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으면 괴로움이 없어요. 취하려고 애쓰는 것도 없죠? 버리려고 애쓰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볼뿐이에요. 그런데 그런다고 아무런 분별이 없느냐? 분별하되, 분별하는 바가 없어요. 하되 하는 바가 없는 거죠. 그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통치할 때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나지 못하고, 과거의 해석 덧칠 된 그 사람을 만나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10년 만에 만난 친구인데, 옛날에 나랑 원수지간이었거나 내가 걔를 너무 싫어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지금, 그 친구는 성격도 달라지고 너무 나를 좋아할 수도 있고요.
그때도 나는 내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내 머릿속에 인식해서는 그 사람을 싫어했지만, 그 친구는 나를 싫어하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 친구는 나를 지금 너무 도와주고 싶을 수도 있어요. 혹은 그때 내가 좀 미안했던 것 때문에 뭔가를 도우고 싶을 수도 있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그 친구를 있는 그대로 만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덧칠된 그 친구를 만나거든요.
그러니까, 그 친구가 나를 너무나 돕고 싶고, 내가 지금 직장이 없는데 그 친구가 나를 막 이렇게 '자기는 성공했으니까 이렇게 취직도 시켜주고 싶고' 이런데, 10년 만에 만나자마자 덧칠 된 분별된 마음의 의식을 가지고 그 친구를 만나서 만나기 싫다, 짜증스럽다, 이런 마음으로 만나면 그 사람과 소통할 수가 없겠죠.
그러면 그 아주 놀라운 기회를 날려버리게 될 수도 있겠죠. 이를테면,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여러분들, 뭐, 저기, 부부지간에도 그렇잖아요. 내가 그냥 무슨 말 하려고 하는데, 저 사람이 화를 벌어낼 수도 있어요. 이를테면, 왜 그럴까요? 과거의 필터를 가지고 이 사람이 뭔 얘기 하려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지금으로 만나지 않으니까 덧칠된 필터로 만나니까 이 사람은 말을 하려고 해도 보통 우리는 안 들어요. 왜? 안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 입만 뻥긋해도 알아, 이래요. 보통 남편분들은 그러죠. 퇴근하고 집에 딱 돌아갔는데 아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뒷모습만 봐도 화가 났는지 아닌지는 안 돼요. 집안의 공기가 일켜진대요. 그냥 그 보살님들은 전혀 티 안 내려고 화 안 난 척하려고 자연스럽게 하려고 애쓰는데도, 그 공기에서 다 안 돼요. 애들이 더 잘 안 돼요.
우리는 이렇게 항상 익숙하게 안다고 생각해요. 분별을 해서 분별의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분별의 필터로를 가지고 보거든요. 하나도 있는 그대로 본 적이 없어요. 대통령, 정치인, 연예인, 모든 사람을 전부 다 우리 스승님 회사 직장, 상사, 자식, 남편, 불교, 모든 존재, 비존재, 상황, 모든 것을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바라봅니다.
그 해석을 빼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드러나는데 광한, 우리가 광하다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이 자중한 눈이 열리는데 관중제가 가능해진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여태까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관중제가 안 되는 방향으로만 살아왔어요.
분별하는 것만 익숙해 있는 거예요. 내 식대로 해석해서 바라보는 거에만 익숙한 거예요. 그리고 더 위험한 건 뭐냐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분별의 지식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내가 더 많이 안다 나는 너희들보다 많이 안다. 많이 알아서 많이 성공했다.
이런 아상이 크면 클수록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지식, 분별의 지식 거기에 대한 집착과 거기에 대한 옳다라는 고집이 강해져요. 아무리 옳아도, 옳은 거에 집착하면 그건 틀리거든요. 그건 상대방을 힘들게 만드는 폭력이 될 수가 있어요. 아무리 옳은 거라도 똑 부러지는 사람 옆에 있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말을 하려고 해도 똑 부러지게 반박을 하면 말을 못 해요. 이렇게 내가 옳다고 여기는 그 인식 그거는 상대적으로 옳을 수밖에 없거든요.
특정 상황에서만 오를 수 있거든요. 인연 따라 옳거나 인연 따라 그르지. 이 세상에는 본래 오른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어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지. 그 옳다, 그르다라는 생각 해석은 자기 분별해서 나오는 거예요..
층간소음과 분별
제가 맨날 이런 비유를 들듯이 이 소리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지만 층간소음에 엄청 스트레스 받던 사람은 이런 소리만 들려도 기분 나쁠 수도 있다. 자제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겠죠. 그러니까 이 소리에서 아니면 특정 상황에서 좋거나 나쁜 게 나오지 않아요. 모든 것이 분별이에요. 분별의 필터로 바라보는 거예요.
더 놀라운 건 뭔지 아세요? 여러분, 내가 있다는 거, 이거는 실존인 것 같잖아요. 진짜 같잖아요. 이 몸이 나지. 나는 진짜 있지가 진짜 같지. 여기 손이 있지. 이게 진짜 같잖아요. 내가 태어났지가 진짜 같잖아요. 나는 남자지가 진짜 같잖아요. 나는 몇 살이지가 진짜 같잖아요.
다 생각 아니에요? 내가 태어났다 이거 생각이에요. 난 남자다 생각이에요. 분별하지 않으면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내가 남자라는 게 있습니까? 여러분이 나이가 몇 살이다라는 게 생각이 없으면 있나요? 당장 기억상실이 딱 와보세요. 외국에 혼자 여행 가다가 기억상실이 왔다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내가 나이가 몇인지 몇 살인지 알겠어요? 내 부모님이 누군지 알겠어요? 몰라요. 생각이 없으면 그런 걸 알 수가 없어요. 또, 실제 여러분들 TV 같은 거 이렇게 보면 내 나이가 지금 많은데도 젊은 원빈이나 자신 강한 예쁜 배우들 보면 막 괜히 설레잖아요. 할머니들도 설렌다 그러세요. 왜 설렐까요? 나이가 벌레 없어요. 우리에게는 나이를 생각하면 아이고 내가 미쳤네. 내가 너만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벌레는 나이가 없어요.
그게 생각으로 나이가 없는 게 아니고 진짜로 진짜는 나이가 없죠. 여러분 명상하라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지관하라는 이유가 뭐예요? 관자 제하라는 이유가 뭐냐면 자제하게 관하면 지금 여기서 생각을 내려놓고 생각으로 거르지 않고 생각에 막힘 없이 그냥 자제하게 본다면, 즉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분별로 해석해 왔던 것을 다 내려놓고 진짜 있는 게 뭐냐. 진짜 자제하게 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명상하고 이러고 있을 때 나이도 없어요.
명상하고 그냥 있는데 거기 나이가 있어요? 한 생각, 이렇게 해야 나이가 있잖아요. 내가 여자다라는 느낌이 있어요? 그 생각이에요. 그냥 명상하고 있을 때는 호흡의 움직임, 어떤 엉덩이의 무게감, 어떤 몸의 간질거림, 이런 어떤 기초적인 감각이나 이런 것들이 그냥 알아차려질 뿐이에요.
실제 벌어지는 일. 관하면 이게 진짜 보는 거 아니에요? 생각으로 보지 말고. 생각으로 보는 건 왜곡해서 보는 거니까 생각으로 보지 말고. 생각으로 보면 어떻게 되냐면 내가 저것을 본다고 둘로 나뉘어요. 그런데 이 봄을 진짜 경험해보란 말이에요. 자제하게 보란 말이죠. 진짜 경험하면 이 봄에는 생각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내가 저것을 본단에요. 정말 봄으로 맨 느낌으로 봄이라는 것을 진짜 자각하면 그냥 볼뿐이에요.
분별과 인식
들을 때 내가 저 소리를 들었어. 저 소리 무슨 소리야? 이건 다 분별이잖아요? 그 분별을 탁 내려놓으면 실제 경험되는 건 뭘까요? 어떤 소리가 들릴 때? 잠깐 눈을 감고 진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세요. 이 일이 벌어지잖아요. 내가 저 소리를 듣는 일이 벌어지냐는 말이에요.
내가 저 소리를 듣는다는 그 분별을 빼면 그냥 이럴 뿐이란 말이에요. 이걸 부처님 방식으로 설명하면 들을 때는 들리는 것을 듣기만 해라. 그러면 그대는 그것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한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함께한다는 거거든요. 둘로 나뉘만 함께할 수 있어요.
함께하지 않을 때 그대는 거기에 없다. 거기에 그대가 없을 때 그대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그 둘 사이에 어떤 세상도 없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이다. 여기에 듣는 나와 들리는 것이 둘로 나뉘지 않아요. 아주 친밀하게 그냥 둘이 아닌 이 하나가 경험될 뿐이에요. 듣는 나와 들리는 것이 둘로 나뉘어서 경험되지 않아요. 첫 번째 자리에서 분별 일으키기 이전에 순수한 첫 번째 자리에서 자제하게 막힘 없이 직관 멈추고 보게 되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러잖아요..
멈추면 뭐가 보이고 뭐가 들리느냐. 둘로 나뉘지 않아요. 그냥 이 친밀한 하나임, 둘이 아닌 이 진실이 드러난단 말이죠.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분별의 필터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아왔는데, 분별 필터를 거치기 이전에 맨 느낌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정견의 시야, 윗바사나라고 말하는 있는 그대로 보는 자제한 관찰, 직관, 관자제, 관세음. 관세음은 뭐겠어요?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 뭐가 세간의 음성이에요? 분별망상하는 생각들, 온갖 분별망상하는 생각이 말로 나가면 세간의 음성이 된단 말이에요. 세간적인, 출세간적인 게 아니라 세간적인 게 분별이거든요. 세간의 음성, 분별하는 음성, 우리들의 분별의 소리를 얘기를 해요. 분별의 행동, 분별의 소리, 이걸 어떻게 해라?
관세음 해라. 세간의 음성을 관하라는 거예요. 진짜로 보라는 거예요. 이게 불교가 어려운 게 아니에요. 관세음이에요, 그냥 관세음. 세간의 음성, 세속적인, 세간적인, 분별하는, 내가 옳다고 여기면서 이건 이렇게 필터로 보고 저 필터로 바라보는 그 세간경으로 바라보는 그 필터를 빼고 올라오는 생각을, 세간의 음성을 그대로 관해라. 멈추고 관해라.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봐라. 분별하지 않고 본다는 거예요. 그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 마음공부는. 그런데 이게 이제 여러분이 이런 법문을 듣고, 잠시 책을 덮고, 법문을 잠시 끄고, 이게 명상하는 시간이랄까요? 고요히 사유하는 시간? 그러니까 수행하는 시간, 좌선을 하라는 이유도 그거예요. 좌선을 무조건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좌선도 상당히 많은 공부에 큰 도움이 돼요.
특히나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도움이 돼요. 좌선을 해서 앉아가지고, 진짜인가? 저 스님 하는 말 사기 아닌가? 자기가 확인해 봐야 돼요. 자기가. 무조건 덮어놓고 믿으면 안 돼요. 부처님께서도 그러시잖아요. 직접 와서 보라 그러잖아요. 부처님이 아니라, 어떤 인류의 스승이 아니라, 어떤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라, 어떤 전통에서 뭐라고 얘기하든, 어떤 스승이 뭐라고 얘기하든, 덮어놓고 무조건 믿지 마라 이래요.
직접 자기가 경험해 보고 그게 맞다면 그때 가서 믿어라 이런단 말이에요. 불교는 무조건적으로 믿어라 이렇게 하는 종교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자기 스스로 딱 앉아서 생각을 쉬고, 생각을 내려놓고 가만히 있어보는 거예요. 처음에는 눈을 감거나, 아니면 이렇게 반개를 가볍게 뜨는 것도 도움이 돼요.
그 상태에서 들리는 모든 것에 그냥 완전히 허용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명상하려고 일부러 산속에만 들어가는 게 명상이 아니에요. 일부러 조용한 곳에 찾아가는 게 명상이 아니에요. 시끄러운 곳은 훨씬 도움이 돼요. 왜? 관세음보살. 세간의 음성을 관하려면 세간의 음성이 있는 곳으로 가야 돼요.
거기가 알았냐예요. 진짜 수행하기 좋은 곳이에요.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은 이근원통 보살이라고 해요. 관음전을 원통 전이라고 부르잖아요. 이근원통이 뭐냐면 귀 잇자, 이근. 듣는 게 원통자제하다 이거예요. 원통자제한 게 뭐냐면 분별해서 듣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듣는 분의 소리예요.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이 이근원통을 통해서 입도했다, 도에 들어갔다 이런단 말이에요.
가만히 앉아서 들리는 모든 소리에 기존의 고정관념을 최대한 내려놓고 들리자마자 곧바로 무슨 소리 무슨 소리소리라는 해석이 막 올라올 거예요. 그리고 이 소리는 듣기 좋고, 저 소리는 듣기 싫고라든지 그런 걸 내려놔야 돼요. 그리고 진짜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그냥 한번 경험해 보란 말이에요. 말로 해석하려고 하면 벌써 어긋난 거죠. 어떤 미세한 소리가 들렸어? 이거 말이에요. 다 말이에요.
다 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그냥 이해해요. 이렇게밖에 더 이상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이러니까 여기서 말로 해석해 버리면 벌써 분별이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 경험하란 말이죠. 그게 관자제의 수행법이에요. 이 근 온통의 수행법이고 대상불교로 말하면 그게 관자제의 수행법이에요.
그 근 온통의 수행법이고 대상불교로 말하면 그게 윗바산하에요. 사념처 수행 하다 못해 고요할 때는 요 호흡 들어오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요. 꽤 크게 들려요. 고용한 곳에서는 잠들려고 이렇게 눕잖아요? 그러면 호흡소리가 크게 들릴 뿐 아니라 이 맥박 뛰는 소리조차 생생하게 들려요. 그걸 맥박 뛰는 소리라고 해석하지 말고 그냥 들어보란 말이에요.
그냥 들으란 말이에요. 그럴 때 진짜 내가 있고 그 들리는 소리가 따로 있는지 한번 보란 말이에요. 직접 보란 말이에요.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건 분별이니까 내려놓고 나가서 그냥 있으면 그냥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냥 이럴 뿐이에요. 거기는 너와 내가 따로 없어요. 둘로 나뉘는 게 없어요. 거긴 그대가 없을 때 그대에게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나와 세계가 둘로 나뉘지 않아요.
그냥 이게 알아차려질 뿐이에요. 이 암 이 분별없는 암 이게 그냥 깨어있을 뿐이에요. 이게 진짜잖아요. 진짜 실상 실상이 비치잖아요.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가 반야지혜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는 것이 관자제보살을 보는 것이고, 관세음보살님을 보는 것이고요. 관세음보살님을 경조에서 이렇게 말해요.
지금 들리는 모든 것에 완전히 나를 허용해 주는 거예요. 조용한 곳을 찾아가는 게 아니고 무엇이 들려도 상관하지 않아요. 자동차 소리도 좋고, TV 소리도 좋고, 옆집 애가 우는 소리도 좋고, 어떤 소리도 괜찮아요. 새소리도 좋고, 무슨 소리도 괜찮아요.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들린다고 해서 나는 뭐가 좀 들렸으면 좋겠는데요 하겠지만 아무것도 안 들릴 때 어때요? 들릴 때 들리는구나라고 알죠? 알아차리죠? 안 들릴 때 지금은 안 들리네 하고 알아차려요.
눈을 뜰 때 보이네 하고 보잖아요? 눈을 감으면 안 보이네 하지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검은 게 보이죠. 늘 보고 있어요. 이 봄은 쉬지 않아요. 항상 살아 있어요. 늘이란 말이에요. 늘 그래서 고요할 땐 고요함을 보는 거예요. 관하는 거예요. 시끄러울 땐 해석하지 않고, 한번 들어보세요.
법화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경전을 해석하는 데는 말을 따라가거나 이념법을 돌아보거나 이런 방식도 있지만 진짜 훌륭한 방식은 관심석이라고 불러요. 선에서 선사스님들이 관심석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을 자기가 깨달아서 자기가 자기 마음을 직접 보고 그 마음의 기초에서 해석한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도 처음에 제가 신조들을 위해서는 실온, 계론, 생천론이라고 해서 좀 쉬운 가르침부터 성행했던 것처럼. 근데 그럼 지금 제가 이렇게 관심석처럼 지금 이 본뜻을 설명한 이유는 뭘까요? 지금의 시대는요. 지금의 사람들은 대부분 대학 나오고 대학 안 나왔어도. 지금이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이 스마트폰을 조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많이 열려있고 많이 깨어있고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에요.
다 알아들어요. 옛날처럼 소수 특권층만 공부하고 마음 공부하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시대예요. 그래서 오늘은 관자제 보살, 관세인 보살님 우리가 설명했던 것처럼 관세인 보살님, 관자제 보살님을 설명드렸던 것처럼 모든 불교의 가르침을 볼 때는 그 말의 이미지만 따라갈 게 아니라 그 말이 우리에게 딱 드러내고자 하는 낙처, 귀결점 거기가 어딘지를 봐야 되고 그것을 본다면 모든 경전의 가르침은 고구정령하게 늘 마음 하나, 법 하나, 진실 하나를 항상 가르쳐 보이고 있다 하는 사실을 알면서 공부를 하면 보다 더 공부하기가 수월해지실 것 같습니다.